디엠지(DMZ) 평화의 길을 걷다
어릴 적 소풍 전날에는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쳤다. 모처럼 새벽 4시부터 잠이 깨 설레는 걸 보니 꽤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. 지난 11월 20일부터 ‘디엠지(DMZ) 평화의 길’ 강화, 김포, 고양, 파주, 화천, 양구, 고성 등 7개 테마 노선이 개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예약 후 당첨돼 길을 떠나는 날이다.
디엠지(DMZ) 평화의 길에 참가하려면 한국관광공사 ‘디엠지(DMZ) 평화의 길’ 누리집(http://www.dmzwalk.com)과 걷기 여행길 모바일 응용프로그램(앱) ‘두루누비’를 통해 온라인으로 사전예약 후 선정돼야 한다.
DMZ 평화의 길은 사전예약 후 선정돼야 여행 참가가 가능하다. |
고양 코스는 행주산성의 이야기와 수도권 최대의 장항습지를 따라 걷는 생태체험 노선이다. 오랜 세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희귀 동식물의 보금자리가 된 장항습지와 수많은 젊은 군인들의 피와 땀이 어린 철책과 군막사를 연계해 노선을 구성했다.
고양관광정보센터에서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하는 총 길이 29.5km의 길이지만 통제구역이라 도보 이동은 3.5km이고, 장항습지 생물 관찰 시간이 있어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. 회차 별 10명 정원이라 경쟁률이 치열해 한 번 탈락 후 당첨됐다.
고양 구간 출발점에 도착하니 시티투어 버스가 반긴다. 코로나19 상황이라 백신접종 완료자, 음성 확인자 여부를 철저히 거친다. 전 여정에 문화해설사, 습지생태 전문가가 동행해 고양시 문화와 장항습지에 대한 해설을 곁들이니 재미까지 더해진다.
디엠지(DMZ) 평화의 길 고양 구간 첫 여정은 시티투어 버스로 시작한다. |
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도착한 평화의 길 고양 구간 출발점은 행주산성 역사공원이다. 2012년 4월 한강 하구를 숨막히게 둘러치고 있던 철책을 처음 걷어 낸 자리다. 평화의 길이 지양하는 정신과 잘 맞는 곳이란 생각이다.
2012년 처음으로 한강 철책을 걷어낸 곳이 출발점이라 의미가 깊다. |
과거 무장공비의 침투에 대비해 군 초소로 운영되던 행호정은 철책선이 철거돼 현재는 행호(한강)의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는 평화의 전망대로 운영되고 있다. 왜 이런 평화로운 풍경을 예전부터 못 누리고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?
한강을 감시하던 군 초소는 행호정이란 전망대로 바뀌었다. |
출발점에서 옛 행주나루터까지 도보로 걷는 1km의 구간에는 ‘행호루’ 전망대와 한강 백사장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내어 공원으로 조성했다. 한강 물결이 넘실대는 강가에 앉아 버들잎을 띄우며 놀았을 정겨운 옛 풍경이 그려진다.
한강의 파도와 버드나무가 어울려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. |
겸제 정선의 ‘행호관어도’에 나오는 행주나루터는 ‘행호’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처럼 잔잔한 곳이다. 어부들이 조각배를 띄워 고기를 잡고, 잡은 고기를 거래하며 시끌벅적했을 나루여서 그런지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진다.
그때 그 시절처럼 지금도 행주나루터에 고깃배가 정박해 있다. |
행주나루터까지 도보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장항습지 탐방 구간의 시작점으로 이동한다. 장항습지 탐방을 위해서는 군인들이 철책 경계를 위해 이동하던 지하 통로를 거쳐야 한다. 지금은 철책이 제거되어 초소를 운영하지 않지만, 살벌했던 남북의 긴장감을 체험할 수 있는 구간이다.
장항습지 탐방은 군인들이 드나들던 통로를 이용해 들어간다. |
장항습지는 오랜 기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돼 철새의 낙원이 되었다.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습지는 자연을 그대로 품어 재두루미, 저어새, 개리 등 멸종 위기종을 비롯하여 물새 약 2만 마리가 도래·서식하는 낙원으로 변했다. 국제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높아 우리나라 24번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는 쾌거를 이뤄냈다.
우리나라 24번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장항습지가 철조망 너머로 보인다. |
군 초소를 리모델링한 장항습지 탐조대의 1층은 전시·교육 시설이 있고, 2층은 탐조 공간이다. 운이 좋으면 망원경으로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를 보는 행운도 누린다. 먹이를 찾아 날아온 다양한 겨울 철새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생태체험 공간이다.
망원경으로 장항습지를 찾은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가족을 보는 행운을 누렸다. |
장항습지에는 바다에서 가장 먼 내륙에서 사는 말똥게와 선버들이 공생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독특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. 군락을 이룬 선버들의 잎을 말똥게가 먹고, 말똥게의 배설물은 선버들의 비료가 된다니 자연의 섭리가 오묘하다.
탐조대를 떠나 장항습지를 관찰하며 걷는 2.5km 구간에서는 다양한 습지 생물과 갈대 군락지, 우리나라 최대의 버드나무 군락지도 볼 수 있다. 간혹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모습도 본다. 일부 구간에 남아 있는 녹슨 철책은 냉전시대의 아픈 유물이지만, 잊지는 말아야 한다.
녹슨 철책 따라 걷는 DMZ 평화의 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. |
디엠지(DMZ) 평화의 길 고양 구간의 종착점은 ‘통일촌 군막사’다. 완전 무장을 하고 경계근무에 나서던 군인들 조형물이 철책에 조성돼 있다. 평화의 길 걷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소원을 적은 명패를 걸어 놓는 시간도 있다. 나도 ‘남북이 휴전이 아닌 종전이 되어 평화누리길 전 구간에 오롯이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있기를’이라 적은 명패를 달았다.
철책을 완전히 걷어내고 한반도 종전선언으로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소원했다. |
한강 하구를 통해 침투하던 북한 간첩을 막기 위해 설치된 ‘통일촌 군막사’는 이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 남아 있다. 이 길이 완전히 개방되는 날 온 가족을 데리고 다시 소풍을 오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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